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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이_박소란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군요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은평병원을 지났습니다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봅니다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을 혼자 걸었습니다언젠가 당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적이 있지요밥이나 한번 먹자 악수를 나누고서 황급히 돌아선 적이 있지요 나는 슬퍼집니다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당신은 벨을 누르고 버스는 곧 멈출 테지요나는 다만 이야기하고..

BOOKS 2025.02.25

너를 기다리는 동안-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개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

BOOKS 2024.02.25

개여울_김소월

당신은 무슨일로 그리합니ㅺㅏ?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안자서 파릇한풀포기가 도다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ㅼㅐ에 가도 아주가지는 안노라시든 그러한 約束이 잇섯겟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안자서 하염업시 무엇을생각합니다 가도 아주가지는 안노라심은 구지닛지말라는 부탁인지요 초판본 진달래꽃 -김소월 시집(1925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개여울」, p178~179, 도서출판 소와다리

BOOKS 2023.12.09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이성복

104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아파트 입구에 내놓은 교자상이 비에 젖고 있다 지금 빗물은 호마이카 상판 위에 고여 있지만 모서리 틈새나 못 빠진 자국 찾아 들어갔다가 햇빛 나면 습기 되어 빠져나갈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든 새댁이 관리실 앞을 지나며 경비 노인에게 인사한다 거의 눈짓에 가까운 인사, 약간 입술을 오므리고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그렇게 하는 인사,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날개 같은 인사 나의 웃음도 그렇게 올라타고 싶구나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날개에 제 날개를 포개는 잠자리 수컷처럼 이제는 동네 슈퍼로 들어가버린 여인, 생각해보라, 술은 술 노래를 모르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것 이성복(2003),「아, 입이 없는 것들」, p120, 문학과지성사

BOOKS 2023.10.13

긍정적인 밥_함민복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2011, p.94

BOOKS 2023.09.26

"겨울 군하리"_김사인

쓰다 버린 집들 사이로 잿빛 도로가 나 있다 쓰다 버린 빗자루같이 나무들은 노변에 꽂혀 있다 쓰다 버린 담벼락 밑에는 순창고추장 벌건 통과 검정 비닐과 스티로폼 쪼가리가 흙에 반쯤 덮여 있다 담벼락 끝에서 쓰다 버린 쪽문을 밀고 개털잠바 노인이 웅크리고 나타난다 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간다 쓰다 버린 개가 한 마리 우줄우줄 따라간다 이발소 자리 옆 정육점 문이 잠시 열리고 누군가 물을 홱 길에 뿌리고 다시 닫는다 먼지 보얀 슈퍼 천막 문이 들썩 하더니 훈련복 차림의 앳된 군인 하나가 발갛게 웃으며 신라면 다섯개들이를 안고 네거리를 가로지른다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 2008, p.29

BOOKS 2023.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