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104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_유홍준

" 뭘 말하려고 망설이지 ? " " 선생님,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요, 돌마리 옛 무덤에 가서도 그렇고 몽촌토성에 와서도 그렇고 백제는 여전히 보이지 않아요. 선생님은 백제의 아름다움 혹은 백제의 미학을 한마디로 뭐라고 말할 수 있으세요 ? " " 안 보이기는 나도 매한가지야. 어쩌면 백제는 회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부드럽다. 온화하다. 친숙하다. 우아하다는 말로 백제를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표현으로야 백제를 말했다고 할 수 있겠나. 나는 김부식이 백제의 미학을 가장 정확하고 멋있게 핵심을 잡아 표현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15년, 그러니까 기원전 4년 항목에 이런 말이 나와요. 춘정월(春正月)에 궁실을 새로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

BOOKS 2025.04.09

그 남자의 책 198쪽

그녀는 8년째 도서관에서 일을 했지만 정작 자신은 책을 읽지 않았다. 저기요, 복사 카드는 어디에서 사나요. 저기요, 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저기요...... 그녀는 도서관에서 이름 대신 저기요, 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래서 도서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누군가 저기요, 라는 말만 하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는 저기요, 라는 호칭이 자신의 이름보다도 더 익숙했다. 앞집에 사는 남자가 이사를 가면서 자전거를 준 뒤로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했다. 40분이 조금 더 걸렸다.       윤성희, , 문학사상사, 2003,  pp.250

BOOKS 2025.03.17

글 읽기와 삶 읽기 3_조혜정

수동성과 자기 성찰의 능력에 관하여      신촌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은 우리의 극단적 수동성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학생을 포함한 신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과 주민, 관의 기획가나 상인 모두를 포함한다. 이것은 실은 신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해당될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참아 내는 선수로 길러졌다. 불편을 불편으로 미처 느끼기도 전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적응해 버리는 타성에 젖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편을 고치기 위해 어떻게 고쳐야 할지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하기 어려워한다. "생각을 하면 그만큼 피곤해진다"는, 전형적인 억압 집단의 사고 유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대학원생도, 그리고 나도, 정도의 차이는 보일지라도,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

BOOKS 2025.03.12

모르는 사이_박소란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군요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은평병원을 지났습니다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봅니다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을 혼자 걸었습니다언젠가 당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적이 있지요밥이나 한번 먹자 악수를 나누고서 황급히 돌아선 적이 있지요 나는 슬퍼집니다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당신은 벨을 누르고 버스는 곧 멈출 테지요나는 다만 이야기하고..

BOOKS 2025.02.25

열하일기_박지원

7월 8일 갑신일(甲申日)      정사와 가마를 함께 타고 삼류하를 건넜다. 냉정冷井에서 아침을 먹었다. 10리 남짓 가서 산모롱이를 접어들었을 때였다. 태복이가 갑자기 몸을 조아리며 말 앞으로 달려 나오더니,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아뢴다.     "백탑白塔이 현신함을 아뢰옵니다."     태복은 정진사의 마두다. 산모롱이에 가려 백탑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재빨리 말을 채찍질했다. 수십 걸음도 못 가서 모롱이를 막 벗어나자 눈앞이 어른어른하면서 갑자기 한 무더기의 검은 공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

BOOKS 2025.01.09

고향_현진건

그때 나는 그의 얼굴이 웃기보다 찡그리기에 가장 적당한 얼굴임을 발견하였다. 군데군데 찢어진 겅성드뭇한 눈썹이 올올이 일어서며 아래로 축 처지는 서슬에 양미간에는 여러 가닥 주름이 잡히고, 광대뼈 위로 뺨살이 실룩실룩 보이자 두 볼은 쭉 빨아든다. 입은 소태나 먹은 것처럼 왼편으로 삐뚤어지게 찢어 올라가고, 죄던 눈엔 눈물이 괸 듯 30세밖에 되어 안 보이는 그 얼굴이 10년 가량은 늙어진 듯하였다. 나는 그 신산스러운 표정에 얼마쯤 감동이 되어서 그에게 대한 반감이 풀려지는 듯하였다.      현진건, , 일신서적출판사, 1997,  pp.239

BOOKS 2024.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