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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동을 기억하는가_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너의 따스한 불빛 안으로 숨어 들어가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몇 세기 전의 겨울을. 최승자. (2022).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P.33 *소리없이 오래 찔리고,..

BOOKS 2026.10.19

산보_파블로 네루다

......나는 조용히 거닌다, 두 눈을 가지고, 구두와분노를 지니고, 모든 걸 잊어버리며,나는 걷는다, 사무실 건물들과 정형외과 의료기구상들 사이로,그리고 줄에 빨래가 널려 있는 안뜰들 -속옷, 수건, 셔츠들에서 더러운 눈물이 떨어지고 있는 거길지나서. 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옮김. (2008). 네루다 시선. 민음사. P.26 부분발췌 * 짙은 청색 양장 시집을 두고, 이제나 저제나 책꽂이에 갖혀 나오질 못함을 보았을 때, 이것은 나의 게으름인지 무관심인지 아니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어터진 밍밍한 국수 먹듯 한 번 후루룩 헤치우고 과감히 이 책을 버릴 요양이었다. 눈에 띄는 문장들은 줄을 치고 포스트 잇을 붙여가며 눈으로 익히고 마음으로 새기고, 읽던 흔적들도 기..

BOOKS 2026.10.04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_김영민

정신의 성숙과 생각의 복잡 통상 공부를 결심한 이가 제일 먼저 손대는 게 책읽기다. 그러나 바로 이게 병통이다. 그래서, 레비 스트로스의 지적처럼 '정신의 성숙과 생각의 복잡을 혼동하는 일'이 생겨난다. 어떤 공부에서든 (좋은) 책읽기를 생략할 수 없지만, 책읽기는 언제나 반편의 진실을 보여줄 뿐이다. 내가 '공부하라'고 하면, 우선 그것은, 규칙적으로 달리기나 윗몸일으키기를 한다거나, 걸어 다니면서 일체 타인의 얼굴을 구경하지 않는다거나, 약속에 견결하라거나, 사린(四隣)과 새 관계를 꾸며보라는 등등의 얘기다. 혹은 타인과 더불어 있는 곳에서는 핸드폰을 드러내지 않는다거나, 작고 허무한 일들에 극도의 정성을 들인다거나, 질투와 시기를 자근자근 밟아 죽인다거나, 자신의 말하기나 앉기 ..

BOOKS 2026.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