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4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이성복

104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아파트 입구에 내놓은 교자상이 비에 젖고 있다 지금 빗물은 호마이카 상판 위에 고여 있지만 모서리 틈새나 못 빠진 자국 찾아 들어갔다가 햇빛 나면 습기 되어 빠져나갈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든 새댁이 관리실 앞을 지나며 경비 노인에게 인사한다 거의 눈짓에 가까운 인사, 약간 입술을 오므리고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그렇게 하는 인사,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날개 같은 인사 나의 웃음도 그렇게 올라타고 싶구나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날개에 제 날개를 포개는 잠자리 수컷처럼 이제는 동네 슈퍼로 들어가버린 여인, 생각해보라, 술은 술 노래를 모르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것 이성복(2003),「아, 입이 없는 것들」, p120, 문학과지성사

BOOKS 2023.10.13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_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차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

BOOKS 2023.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