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38

모르는 사이_박소란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군요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은평병원을 지났습니다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봅니다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을 혼자 걸었습니다언젠가 당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적이 있지요밥이나 한번 먹자 악수를 나누고서 황급히 돌아선 적이 있지요 나는 슬퍼집니다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당신은 벨을 누르고 버스는 곧 멈출 테지요나는 다만 이야기하고..

BOOKS 2025.02.25

부끄러운 짝사랑_박노자

..그러나 한국 문학의 참된 보배들은 아무리 번역을 해도 저들이 쉽게 이해하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개인적 생각으로 김수영은 20세기의 시성(詩聖)이지만, 그의 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서구인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실존적 경험이나, 적어도 이에 상응하는 깊은 고민을 요구한다.    가난뱅이의 체취가 묻은 작품을 부자가 좋아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몸을 굽혀가면서 저들의 기호를 의식하고 거기에 맞출 필요가 있는가 ? ..  문학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약이 될 수 있다면 그 약은 아픈 사람에게 먼저 필요할 것이다.    박노자, , 한겨레출판, 2006,  pp.59~60

BOOKS 2024.04.22

너를 기다리는 동안-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개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

BOOKS 2024.02.25

나의 행복론-이호철

“인간은 의욕적으로 감행하여, 마침내 창조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모름지기 행동하여 각고 끝에 목표한 것을 획득할 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쾌락보다는 행동을 수반한 고통을 택하는 게 차라리 인간답다.” “결국 인간의 행복은 제각기 처한 상황에서 한껏 양껏 행동하는 것, 주어진 자신의 생명력과 에너지를 송두리째 연소시키며 보람 있는 일을 해내는 것, 바로 그 창조행위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요컨대 인간의 행복이란 끊임없는 행동, 끊임없는 움직임, 약동하는 생명의 연소 그 자체이다. 그것은 남이 보기에는 고통이지만 살아 있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사람은 누구나가 제각기 생긴 만큼, 처한 상황만큼, 행동의 장이 정해지게 마련이다. 그 장의 성질에 따라..

BOOKS 2024.01.18

개여울_김소월

당신은 무슨일로 그리합니ㅺㅏ?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안자서 파릇한풀포기가 도다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ㅼㅐ에 가도 아주가지는 안노라시든 그러한 約束이 잇섯겟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안자서 하염업시 무엇을생각합니다 가도 아주가지는 안노라심은 구지닛지말라는 부탁인지요 초판본 진달래꽃 -김소월 시집(1925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개여울」, p178~179, 도서출판 소와다리

BOOKS 2023.12.09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_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차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

BOOKS 2023.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