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새 사이에서_최승호

BYEORI ARCHITECTS 2023. 8. 17. 11:51

나무와 새 사이에서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고 언제나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 그

리고 자신을 우주적으로 펼치면서도 안정되어 있다. 새는 하

늘에서 날개를 치며 가고 싶은 곳으로 훨훨 날아간다. 묶이

는 바 없이 홀로, 가볍고도 활달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나

무와 새 사이에서 나는 나무들의 든든한 안정과 새의 드넓은

자유가 부러울 따름인데, 왜냐하면 내 발은 뿌리가 아니요

나의 팔은 날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뿌리도 없고 날개도 없

는 나의 이류중생(異類衆生)에 늑대가 있다. 그는 땅 위를 돌

아다니다 땅 위에서 죽는다. 긴 굶주림 끝에 땅의 것이었던

가죽이며 뼈를 땅에 되돌려 주는 것이다. 어쩌면 삶이라는

것이 광활한 사막에서 떠낸 모래 한 덩이가, 모래들을 덧보

태며 돌아다니다가 인연이 다해 허물어지는 모래들의 이동

이 아닐는지. 아무리 모래들이 이동해도 사막에는, 모래의

늘어남이 없고 줄어듦도 없다. 만약 내가 이동하는 모래덩어

리라면 나의 삶도 없고 나의 죽음도 없고, 살았던 나도 없고

죽었던 나도 없다. 나라는 것은, 아예 없다. 물론 욕망이라는

것이 팽창했다 수축하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회오리치며 일

어났다 허물어지는 모래기둥이나 늑골만 앙상한 죽은 늑대

의 꿈처럼, 사막 어디에서도 그 부풀어오르던 열기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흔적도 마찬가지다. 사막이 늑대 발자국을

오래 놔두지 않는다. 모래 위에 바람이 다른 모래를 끼얹고,

사막에 달이 뜨고, 새 한마리 날지 않고, 늑대 울음소리도 들

리지 않는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말할 때가 되었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나무들이 서 있고 새가 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숨 쉬는 바람이 있고, 나무와 새 사이에서 숨 쉬

는 내가 있다. 

 

 

최승호.2009.<반딧불 보호구역> 뿔. p.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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